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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Lang-8 : aiai's Latest Journal Entries</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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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aiai's latest journal entries</description>
    <copyright>Lang-8 Inc.</copyright>
    <pubDate>Tue May 21 19:23:07 UTC 2013</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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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aiai : 중국어를 배우고 싶은 사람  여기 오세요. 가르쳐 줄 수 있어요!!ㅎㅎ 방학이라서 시간 많아요. ㅋㅋ (17)</title>
      <description><![CDATA[

ㅋㅋ
<br /><br />Posted at Sat Jan 14 13:40:00 UTC 2012<br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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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creator>aiai</dc:creator>
<pubDate>Sat Jan 14 13:40:00 UTC 2012</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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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aiai : 감사 감사 merry christmas (1)</title>
      <description><![CDATA[

1.제2차 세계대전 후에 미국은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걸프전쟁, 이라크전쟁 등을 주도했고 다른 나라에 군사간섭과 군사위협을 가한 것을 포함하면 60번이 넘은 전쟁을 벌인다고 했다. 미국은 대외적인 전쟁과 군사적인 행동을 취하는 것은 세계 1위이고 국제 관계를 처리할 때 미국은 무력이 가장 직접적이고 실용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미국 헌법에 따르면 선전권은 국회에 있다고 규정하지만 조선전쟁, 베트남전쟁 등 국회의 공식적인 선전을 받지 못한 채 전쟁을 벌였지만 국회는 이 군사 행동에 지원을 제공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조선전쟁과 베트남 전쟁 기간 국방 예산과 특별자금지원을 제공하고 특히 베트남 전쟁 때 국회는 전쟁이 심해진 위험을 피하기 위해 대통령의 모든 개인 결정을 지지한다고 했다. 국회와 헌법은 결국은 장식에 지나치 않았다. 지도자 개인의 요소, 경제적인 이익, 정치적인 패권등 윈인으로 전쟁을 벌였지만 결국은 국민들에게 이 전쟁의 피해를 돌리고 사회가 혼란해진다. 그해서 전쟁을 좋아하는 사람이 거의 없고 전쟁 얘기 꺼내면 두려워하고 벌벌 떨리다. 지금은 평화와 발전의 세계이지만 많은 나라의 국민들이 폭력에 휩싸여 있는 것이다. <br />2.경제를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선군정치와 핵실험을 진행하기 때문에 북한 인민들이 더 심한 어려움에 처하고 있다. 굶어죽은 사람들이 많이 발생해서 살아나기 위해 중국이나 몽콜 등을 경우하여 한국으로 탈출을 시도한 경우가 많다.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탈북자를 한국 사회에 정착시키기 위해 이들에 맞는 특화된 제도적 정책이 필요하게 된다.<br />3.'통일부의 북한이틸주민입국인원 현황'을 보면 지원금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아직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무슨 원인으로 정칙금을 받지 못한가?에 대해 궁금하다.  <br />4.한국은 탈북자들을 자신의 국민으로 인정하지만 사회적으로 한국 국민의 인정을 받는 것은 역시 어렵다. 어떤 선배에 말에 의하면 수업할 때 같이 수업 듣는 여학생있는 데 한국 학생들이 거의 친절하게 대하지 않고 말을 별로 하지도 않다. 물론 그 탈북자 개인적인 원인도 있지만 한국 사람들이 역시 탈북자를 동일시하지 못한다.   남북한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며 반공교육의 영향아래에 있는 남한 사회에서 북한에서 온 사람은 대부분 간첩으로 생각하거나 불순분자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들이 새터민의 정착에 어려움을 느끼게 하고 있다. <br />
<br /><br />Posted at Fri Dec 23 23:30:55 UTC 2011<br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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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creator>aiai</dc:creator>
<pubDate>Fri Dec 23 23:30:55 UTC 2011</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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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aiai : 감사 감사 감사  (4)</title>
      <description><![CDATA[

 중국의 근현대사는 주로 세 시기로 구분될 수 있고 1840-1949년, 1849-78년, 1978년-지금으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한다. 먼저 1840년은 중국의 첫 번째 개혁개방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하지만 1978년의 개혁개방과 달리 피동적인 개혁개방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시기의 개혁개방을 강제한 서구는 주체가 되어 서구의 중국사 연구는 주로 중국을 객체로 보고 주체의 영향 하에 어떻게 봉건 사회에서 벗어나고 근대 사회에 진입한 것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같은 식민지 운명을 가진 한국은 이 시기의 중국 역사 연구는 동정적이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편 이 시기에 대한 중국 학자의 연구 흐름은 당연히 서구의 식민지 통치와 착취 하에 어떻게 반항하고 어떻게 이 비참한 운명 속에서 벗어나는 찬란한 투쟁사를 자랑하고 있다. 즉 서구를 만악의 타깃으로 삼고 무너질 때까지 계속 활을 쏘고 있었다. <br />  <br />  특히 1921-49년의 중국사는 완전히 공산당을 주체로 어떻게 중화민족을 고난 속에서 구했는 지에 대해 다루고 있다. 공산당이 없었으면 새로운 중국이 없다는 의식이 이미 중국 사람 머리 속에 각인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중국 젊은 사람들은 모택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물어보면 그의 잘못보다 그의 공적이 먼저 떠올리고 감격의 마음을 품고 있다. 그리고 장개석은 초기에 얼마나 훌륭해도 호감을 갖지 못한다. 지금은 중국은 공산당 일당 집권하기 때문에 이런 역사의 연구 방향은 필요하고 사회를 안정시키는 데도 큰 역할을 한다. 그래서 이시기의 중국사 연구는 중국 학자에게 이미 틀에 국한되어 벗어나려고 해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외국 학자들에게 이런 국한이 없어서 이런 시기의 중국사를 꼭 중국 공산당을 주체로 다룰 필요없다고 생각한다. 사실은 1949년 중화인민 공화국 성립 전에 계속 국제 사회에서 인정받는 중국 정부는 국민당 정부이고 공산당을 주체로 삼면 국제 교류 등에 관한 것은 공산당의 입장으로 설명하면 당연히 왜곡할 경우가 많고 잘 풀이할 수 없는 경우도 많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다른 시각으로 이 시기의 중국사 연구는 아마 중국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고 계속 중국 국내 국민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다. <br />  <br />  위에 보듯이 같은 시기에 대한 각국의 학자의 다른 입장으로 생긴 차이 때문에 서로를 비판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이 시기의 중국 연구는 혁명사에 국한 되어 있고 중국사아니라 혁명사라 공산당사라고 부를 수 있다고 외국 학자들이 지적하고 있는 반면 중국은 외국들의 연구는 자신의 침략의 죄악을 덮으려고 만든 아름다운 거짓말이라고 반격했다. <br />  <br />  1949-1978년의 중국사 연구는 주로 중국의 기존의 문서나 자료를 토대로 중국 학자는 객관적인 입장을 갖고 있지만 많지 않은 외국 학자들이 이 시기의 퇴보나 잘못을 과장한 경향도 보인다. 개혁개방 후에 국내의 중국 연구는 주로 개혁개방로 따라온 경제적인 번영을 다룬 반명 외국 학자는 주로 중국의 궐기로 인한 중국 위협론이 대두한다. <br />
<br /><br />Posted at Thu Dec 08 01:51:06 UTC 2011<br />]]></description>
<link>http://www.lang-8.com/181809/journals/1217268</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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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creator>aiai</dc:creator>
<pubDate>Thu Dec 08 01:51:06 UTC 2011</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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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aiai : 폭력의 예감    부탁합니다. 감사합니다 (2)</title>
      <description><![CDATA[

 오키나와를 하면 먼저 떠올리는 것은 미국 군사 기지 이전 문제이고 인터넷에 검색하면 거의 다 오키나와 여행에 관한 것이 몰려온다. 중국에서는 오키나와학에 관한 것은 거의 없고 오키나와 혹은 '류큐왕국'의 근현대사에 관한 것에 불과했다.<br />  <br />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1609년부터 일본의 경제적인 착취를 당하고 1879년에 들어서  일본에 의해 해체되고 일본의 현으로 합병된 오키나와는 2차대전 종결 후 미국에 통치에 처했을 때 조국인 일본에 복귀한 운동을 벌였는 가? 자료를 찾아보면 하나는 일본의 동화교육이고 예를 들면 일본과 류큐는 같은 조상이 가진 것이었다. 다음으로 미국의 식민지 통치로 민주와 자유를 상실한 것을 통감하고 냉전 체제가 구축된 상황에서 다시 전쟁에 휩쓸리지 않도록을 일본을 선택한 것이었다. 즉 미국의 비인간적인 통치와 다시 전쟁터가 된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때 민주와 자유를 선전한 일본국을 선택한 것이라고 어떤 학자가 지적했다. 이런 것도 개인적인 입장이고 설득력이 좀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br />  <br />  재미있는 것에 2007년 어떤 조사에 따르면 71.4%의 오키나와 사람들이 130년 전에 류큐왕국은 해체되고 일본의 현이 된 것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7.6% 좋지 않다고 생각하고 좋고 나쁨을 모르는 사람은 6.8%이며 그냥 생각하는 사람이 13.5%를 차지했다. 오키나와는 조선, 대만과 달리 직접 식민지로 된 것이 아니라 일본의 본토처럼 현을 설치하여 관리한 방식을 택했다. 하지만 진짜 본토의 사람과 같은 대우를 받았는가? 당연히 아니었다. 일종의 본토 식민지 혹은 반식민지라고도 할 수 있었다. 일본에게 오키나와는 노동력과 병력의 공급처일 뿐이었다. 그래서 '오키나와는 장남이고 대만은 차남이며 조선은 삼남이라고 비카比嘉가 지적했다. 완전히 식민지에 빠진 국가의 사람과 형식이 좀 다르지만 역시 폭력에 처하고 있고 이 폭력을 미리 감지하고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폭력은 관동대지진때 조선인으로 오인받아 살해당한 오키나와인들, 2차세계대전 말기에 일본의 본터의 유일한 전쟁터로써 오키나와는 '옥쇄'를 강요당하고 그들은 바로 폭력에 직면하고 있었다. <br /><br />  ....................<br />  <br />  오키나와학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이하후유에 대해 중국의 학자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은 거 같다. 왜냐하면 그는 일본과 류큐는 같은 조상인 것을 찬성하기 때문이다. 일본의 동화정책에 중독되고 다른 오키나와 사람에게도 전염했다. 중국학자 눈에 보면 그는 자신의 조상을 배신하고 자신의 민족을 버린 매국노처럼 보였다. 그냥 나라마다 보는 시각이 좀 다른 것 같다. 지은이는 이하후유는 자신이 처한 곳은 식민지인 것을 잘 알고 그 식민지의 폭력을 예감하고 그 폭력을 폭로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br /><br />  <br />  오키나와는 앞으로 '주권' '조국'이라는 문제에 매달리지 않아도 되는 가? 근대국가라면 다 국가주권과 민족자결의 틀에서 모든 업무를 처리하고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하고 자신의 나라 자신의 조국을 있어야 하지만 오키나와인에게 대해 굳이 이런 사고방식에서 구애받을 필요가 있는 가? 조국이든 정체성이든 다 버려도 자유, 민주. 경제의 번영을 추구할 수 있지 않을 가 싶다.<br />
<br /><br />Posted at Wed Nov 23 01:06:29 UTC 2011<br />]]></description>
<link>http://www.lang-8.com/181809/journals/1195882</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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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Date>Wed Nov 23 01:06:29 UTC 2011</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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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aiai : 토지혁민의 변화 (2)</title>
      <description><![CDATA[

토지개혁의 변화로부터 본 공산다의 정책 변화 <br />1927-1937년 국공대항 즉 내전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의 토지정책은 빈농과 고농에 의지하고 중농을 연합하며 부농을 규제하고 지주계급을 없애야 한다는 것이고 공산당은 하층계급을 중심으로 지주계급과 관료 푸로조아를 대변한 장개석 정권에 대한 투쟁이라는 정치 입장을 엿볼 있다. 이 시기의 국내의 주요 무순은 대지주계급,대자산계급과 인민대중간의 무순이고 이런 토지정책을 취해야 하층 인민군중의 지지를 받을 수 있고 도시말고 농촌에서 혁명근거지를 건설한 기반을 마련된다.<br />1937-1945년의 토지개혁정책은 전의 정책에 비하여 지주계급을 없애는 것을 지주 감조감시(减租减息)로 바꾼다. 이 시기에 국내의 주요한 무순은 중화민족과 일본제국주의의 문순으로 전환하여 각 당파의 이익보다 먼저 민족 이익과 인민의 이익을 중요시한 것을 토대로 국공 양당은 손을 잡았다. 국산당의 하층통일전선도 항일민족통일전선으로 바꿔 대지주든 관련푸르조아든 일제를 반대한 사람이라면 다 협력 대상이었다.<br />1945-1949년의 토지개혁은 가장 큰 변화는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고 농민에게 분배한 것이었다. 일제의 항복에 따라 이시기의 가장 주요한 모순은 다시 지주, 관료 푸로조아와 농민의 모순으로 돌아왔다. 최대한 인민의 반장개석 반봉건의 적극성을 추진하고 해방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br /> <br />
<br /><br />Posted at Wed Oct 26 14:22:18 UTC 2011<br />]]></description>
<link>http://www.lang-8.com/181809/journals/1156996</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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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creator>aiai</dc:creator>
<pubDate>Wed Oct 26 14:22:18 UTC 2011</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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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aiai : 오늘 오후 2시  고쳐준 분이 있나요?  ㅎㅎ 너무 감사합니다. (0)</title>
      <description><![CDATA[

국민혁민의 전개, 굴절 및 남경정부의 성격<br />1.국공합작에 대한 이식<br />  1924년1월 광주에서 개최된 중국국민당제1차대표대회는 소련의 지원과 지도를 받아들여 공산당원의 개인자격으로서의 국민당 입당을 허용하고 반제국주의와 농공에게의 부조를 표방함으로써 제1차 국공합작이 성립되었다. 이런 국공합작은 단순히 국민당과 공산당만의 합작이라고 볼 수 없고 국민당과 공산당 그리고 소련 코민테론의 상호이용, 상호 타협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br />  합작 전에 국민당의 역사를 보면서 송문의 사상의 전환을 분석하도록 하겠다. 먼저 5.4운동을 통해 프로주아 계급만으로는 혁명의 성공을 얻을 수 없고 농민과 프롤레타리아의 힘을 무시할 수 없어서 그들을 연합해야 한다고 실감했다. 그리고 북벌의 근거지로써의 광동군정부는 제3차 군정부이고 제 1차과 제 2차의 실패를 겪은 송문은 서남 군벌과 진형민 등의 반동군벌을 이용하고 다른 반동군벌을 타도한 것은 안 된다고 인식했다. 서구제국주의 도움과 지지를 받지 못한 상태에서는 송문은 소련에게 호의를 보냈다. 소련의 군사과 경제적인 지지를 원하게 되었다.<br /> 이시기의 소련은 제국주의의 봉쇄와 국내의 반동 세력의 파괴활동에 대해 안정한 주변환경의 유지와 국제 파트너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5.4운동을 겪은 중국은 이미 마르크스 사상을 전파하고 중국은 소련과 인접되고 소련의 대외 완충지로 삼을 수 있는 지리적인 요소등으로 소련은 중국에서 친소련 정당과 정부를 수립한 것을 시급하다고 인식하고 국민당과 공산당의 합작을 적극적으로 주도하고 추진했다.<br /> 한편, 이시기의 공산당은 유년기에 처하고 인원수는 적고 힘이 약한 편이었다. 공산당의 사실상의 지도자와 권력자는 소련의 코민테론이라고 할 수 있었다. 공산당의 개인적인 자격으로 국민당에 가입한 점에서 이런 소련측과 공산당 간의 상하지위를 엿볼 수 있었다. 공산당은 처음에는 수동적으로 국공합작을 동의하지만 이후의 진행 과정을 보면 공산당의 발전에 대해 좋은 일이 아닐 수 없다고 한다. 국민당 명의를 빌려 공산주의 사상을 더 널리 전파하고 자신의 정당성을 확립할 수 있었다. 송문에 대해 공산당은 무시할 수 있는 정당지만 소련과 연결하는 데 필수의 일환으로써 가교역할이라고도 인식했다. 즉 소련의믿음과 지지를 얻으려면 공산당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br />  이렇게 서로의 이익을 이룩하기 위해 한자리에 모였다. 하지만 서로간의 갈등 때문에 결국은 실패에 이르렀다.<br /><br />2. 국공 파열에 대한 인식<br />  1927년의 4.19쿠데타와 7.15쿠데타로 인해 국공합작이 파열되었다. 국민당 내부에 죄익과 우익으로 분열되고 송문 돌아가신 후 우익은 그 권력을 잡았다. 우익의 남경정부는 대관료 프로주아과 대지주의 이익을 대표한 정부이고  공산당은 농민과 프롤레타리아의 이익을 대표하고 실현하려는 정당이어서 이데올로기측면에서 대립한 상태이었다. 그리고 이런 불타는 농민과 노동자의 운동은 대프로주아를 대표한 우익의 이익을 침해하고 위협했다. 그 밖에 소련측의 운동방침과 지도에 대해 국민당의 입장, 사상, 전략의 차이로 갈등이 심해졌다. 처음에의 국공합작은 그냥 지도자 측면에서 공식을 이룩한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국민당 측은 송문의 권위 때문에 이런 합작을 받아드릴 수 없는 것이고 공산당 측면에서도 일부분의 지도자에 국한되고 있었다. 즉 국공합작의 이념은 국민당과 공산다의 말단까지 스며들지 못한 상태였다. 이 요소는 역시 국공 파열의 중요한 윈인 중의 하나이다. <br />
<br /><br />Posted at Thu Oct 20 01:42:15 UTC 2011<br />]]></description>
<link>http://www.lang-8.com/181809/journals/1148000</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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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Date>Thu Oct 20 01:42:15 UTC 2011</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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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aiai : 감사합니다 (2)</title>
      <description><![CDATA[

4. 5.4운동의 의의 <br /><br />  초보적인 지식분자들은 5.4운동 과정을 통하여 노동자계급과 지접접촉하고 이들이 결집되 힘을 발견하고 또 제국주의세력의 본질을 인식하게 됨으로써 진정한 공산주의자로 변신해 갈 수 있었을 것이다. 마르크스 사사의 전파를 추지하여 5.4운동 후 노동자 계급이 공식적으로 역사 무대에 등장했다. 그리고 마르크스 사상과 노동자 계급을 결합되어 공산당이 설립되었다. 교육 면에서 남녀평등을 주장하면서 여성도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되고 대학에서 인문 지리뿐만 이나라 의학 과학등 배울 수 있게 된다. 무엇보다도 개성의 해방과 과학을 추구하며 악세력에 두려워하지 않은 투쟁 열정 등의 5.4정신은 오늘까지 계속 우리 젊은이에게 큰 영향을 미쳐왔다.<br /><br /><br />  배경한 선생님의 글을 보면 5.4운동에 대한 정부 관심은 점점 식어진다고 했다. 5.4운동 기념 대회도 점점 위축된 추세이다. 이와 반대 대륙에서 신핵핵명의 기념대회는 불처럼 진해되고 있었다. 이는 역시 정치적인 영향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공산당은 신핵혁명 그리고 송문의 재평가등을 통해 대만의 호감을 사고 통일을 도모하지만 대만은 과연 같은 심정을 가진가? 5.4운동과 89년 천안문 사건같은 학생들의 시위는 사회 안정 측면 그리고 공산당 정치 확립에 불안정을 일으킬 수 있어서 그냥 적당히 기념행사를 진행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역사 책에서의 5.4운동에 대한 해석 아마 정치적인 요구과 공산당의 정당성에 출발한다고 할 있다.<br />
<br /><br />Posted at Thu Oct 13 02:58:15 UTC 2011<br />]]></description>
<link>http://www.lang-8.com/181809/journals/1137568</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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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Date>Thu Oct 13 02:58:15 UTC 2011</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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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aiai : 2 (0)</title>
      <description><![CDATA[

4. 신해혁명의 과정<br />송문은 하와이에서 흥중회를 조직한 후 무창봉기 전에 열 번정도의 봉기를 했지만 거의 다 실패하고 많은 젊은이들이 생명을 잃었다. 송무는 외국을 돌아다니면서 화교의 지지와 자금을 모집하고 혁명 사상을 전파하기에 힘썼다. 봉기의 실패와 수많은 희생,그리고 만청정부의 흔드림이 없는 것과 혁명자금의 내역 불공개로 인해 동맹회 내부는 사실은 명존실망한 분열 상태이었다. 이 분열 상태는 역시 신해혁명의 유산의 원인 중 하나이라고 볼 수 있다. 마관조약이나 신축조약 그리고 의화단에 대한 잔혹한 진압등 민청정부는 이미 민심을 잃고 반청혁명사조가 급속히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이런 와중에 만청정부는 자구신정을 출범했다. 이 신정은 서구사상의 전파와 유학생, 학당학생을 비롯한 신지식분자의 급증에 큰 영향을 미쳤다. 신지식분자는 후기 혁명당의 주력군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리고 혁명파와 개량파의 논쟁에서 혁명파의 승리로 혁명의 의지를 한층 더 추진했다. 이런 시기에 만청정부의 철로 권리 정부 회수도 역시 입헌파에 의해 정치적으로 대표되는 지방신사층의 반대를 일으켰다. 사천보로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북신신군은 호북성에서 나갔다. 호북성은 공성이 된 것도 역시 무창 봉기의 승리를 예시했다. 호북성의 해방에 따라 남북 지방은 거의 무력 없이 해방되었다. 만청정부는 이런 때 원세개를 의지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북양신군 거의 원세개의 명령만 듣기 때문이다. 무창봉기의 혁명파는 통일적인 지도능력을 결핍할 뿐만 아니라 자체의 내부에서도 강고한 단결이나 통일적인 행동은 결여되어 있었다. 즉 그 들은 일단 청조에 반대하고 공화혁명에 찬성하기만 하면 구관료든 모두 받아들여 합작하였던 것이었다.이러한 혁명파의 이론적 인식의 한계는 결국은 혁명에서 핵심적인 과제인 권력의 장악에 실패--원세개는 제국주의의 지지를 받고 신해혁명의 과실을 빼먹었다. <br /><br /><br />올해 신해혁명 100주념이다. 신해혁명에 관한 영화나 드라마는 많이 제작되었다. 이런 미디어를 통해 다시 한번 100년 전에 역사을 돌아보면서 사상의 억압을 느꼈다. 역사를 서술할 때 주류된 정부색채나 무조건 창의성을 추구하기 위해 역사 사실을 왜곡한 개인주의를 바라직하지 않다. 아무런 변화 없는 마치 고인 물과 같은 생활에서 산 사람들이 바람과 구름처럼 급변한 시대를 실감할 수 없다. <br />
<br /><br />Posted at Thu Oct 06 02:34:12 UTC 2011<br />]]></description>
<link>http://www.lang-8.com/181809/journals/1127206</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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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Date>Thu Oct 06 02:34:12 UTC 2011</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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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aiai : 따뜻한 분 기다리는 중  ....  오늘 오후 2시까지   너무 감사  (1)</title>
      <description><![CDATA[

2.신해혁명의 주체 <br />  신해혁명의 주체를 말하자면 당연히 혁명파이다. 그럼 혁명파란 혁명당만을 가리키는 것인가? 입헌파도 혁명파에 속하는 것인가? 책을 보면 좀 혼란스럽다. 수단으로 아니면 목표로 혁명과 개량을 구분한 것인가? 개량과 혁명은 각자의 실현 목적으로 구분해야 한 것을 배웠다. 그럼 혁명당은 만청정부를 무너뜨리고 목표는 민주공화국이고 입헌파는 만청정부를 무너뜨리고 목표는 군주입헌이다. 둘이 다 반독재적이고 민권을 주장한 것에 비하여 만청정부의 독재 체제에 정반대이다. 이런 공통점 때문에 혁명당과 입헌파는 서로 협력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무창 봉기의 발기자는 혁명당이지만 그 후에 남부 지방 각성들이 기치를 바꿔 혁명을 응원한 것을 추진한 개헌파는 역시 그 역할을 간과하면 안 된다. 입헌파는 혁명당이 아니라 만청정부와 같은 입장이면 그 결과를 생각하면 입헌파의 역할을 실감할 수 있다. 입헌파는 본래 만청정부에 기대를 갖고 있지만 만청정부의 ‘황족내각’의 수립과 4번 청원의 실패는 입헌파와 만청정부의 결렬을 만들었다. 한편 혁명은 꼭 폭력이고 개량은 평화적인 것인가에 대해 다시 다룰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위에 말한 듯이 입헌파도 혁명파라 할 수 있으면 입헌파의 혁명과 혁명당의 혁명의 차이는 뭣인가? 하나는 유질서의 혁명 하나는 폭력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혁명당들은 한 지역을 점령하면 감옥에서의 범인들이 석방한 것에 비하여 입헌파는 오히려 범인들이 빠지지 않도록 감옥장을 잘 보호해야 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신해혁명은 그렇세 격렬한 혁명이 아니라고 한 것은 혁명당과 입헌파의 중화에 관련성이 있다고 할 수도 있겠다.<br /><br />3.신해혁명의 대상<br />  신해혁명의 대상을 말하면 논쟁이 없는 것 같다, 바로 만청정부이다. 송문을 비롯한 혁명파는 갑오중일 전쟁 후에 만청정부에 환상을 갖고 있지만 이홍장에게의 상서 실패 후에 바로 혁명의 길을 걸었다. 입헌파도 만청정부와에게 청원을 통해 민권을 도모하지만 결국은 노력은 거품으로 돌았다. 제국주의는 혁명의 대상이 되지 않은 것은 혁명파들이 제국주의의도움과 지지를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하겠지만 결과적으로 제국주의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br /><br />
<br /><br />Posted at Thu Oct 06 01:35:17 UTC 2011<br />]]></description>
<link>http://www.lang-8.com/181809/journals/1127152</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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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Date>Thu Oct 06 01:35:17 UTC 2011</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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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aiai : 도와준 사람이 있어요. 오늘 2시까지... (1)</title>
      <description><![CDATA[

중국의 삼협대공정三峽工程의 건설과정은 다음과 같다. 삼협댐三峽大壩의 구상은 민국시기에 거슬러볼 수 있다. 1919년 송문孫文은 배가 거슬러갈수 있고 수리도 잘 이용할 수 있도록 지금의 삼협댐 입지인 의창宜昌에 댐을 건설했으면 좋다고 했다. 그 후에 국민당은 미국의 협력을 받고 적극적으로 추진해지만 중국 내전 때문에 유산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한 후 양자강 상류 홍수 빈발하여 중류와 하류 계속 위협한 상태에서 모택동毛澤東 주석께서는 삼협댐의 시급성을 인식하고 이런 계획을 주은래周恩來 총리에게 지시했다. 소련의 협력을 받고 지리답사와 설계  그리고 검토 논증을 진해했다. 황망리黃萬里를 비롯한 반대파와의 논쟁을 거쳐 기술적이나 국제 정세를 고려한 끝에 삼협공정의 시험공사로 먼저 끄주댐葛洲坝을 건설했다. 끄주댐은 한 때 중국에서 가장 큰 수력발전소이었다.<br />개혁개방이 진행하면서 삼협댐이 다시 의제로 거론되었다. 전문가들이 검토한 결과는 건설하지 않은 것보다 건설한 게 낫고 늦게 건설한 것보다 일찍이 건설한 게 낫다는 것이다. 반대파의 커다란 압력에서 1992년에 이 공정의안을 인민대표대회에 제출했다. 67%의 찬성 표로 통과했지만 이번 결의는 지금까지 인민대표대회에서 가장 낮은 표수로 통과한 의안이었다. 1993년부터 2009년까지 17년을 거쳐 총투자액은 954.6억위안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수력 발전소를 완공했다. 그 투자액의 45% 즉 450억위안뿐만 아니라 129개의 도시의 113만 명의 이민들에게 교부금도 배풀었다. 이민도시의 인프라 구축했지만 공업발전이 좀 주춤한 상태에서 실업율이 높아지고 경재 성장 속도 느린 것등 사회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에 시위도 벌였다. 그밖에 삼협댐으로 인해 발생한 환경문제도 간과하면 안 된다. 어떤 사람은 댐이 대지진과 연관성이 있다고도 했다. 삼협땜과 후쿠시마 원발의 공통점과 차의점은 다음에 하겠다.    <br />
<br /><br />Posted at Wed Oct 05 02:24:17 UTC 2011<br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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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Date>Wed Oct 05 02:24:17 UTC 2011</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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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aiai :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원발)의 설립 경위1    졸려 ....남은 것 내일 ... (0)</title>
      <description><![CDATA[

옛날에 동북 지역에서 ‘동북 티베트’ ‘후쿠시마 티베트’로 불러온  원발 소재지인 후쿠시마 双葉군은 동북 지역에서 가장 빈약한 지역이었다. 이 빈약한 농어촌을 중앙의 경제와 정치 체제에 편입시킨 계기는 바로 전쟁이었다. 1938년 군부는 지금의 후쿠시마 제일 원발의 지역의 일부분 토지를 강제로 매수하고 비행팀의 분교를 개설하고 육군의 비행 연습장으로 만들었다.<br />  전쟁이후 이토지는 수년간을 거쳐 방치되고 황무지가 되었다. 이 황무지를 산 堤康次郎의 국토계획으로 대규모의 소금밭을 경영하게 되었다. 발전소는 바닷물을 농축하고 파이프로 역까지 수송한 후 특정한 제염소에서 소금을 만들고 철도로 수도권에 운반하였다. 전후 소금은 아주 귀한 것이고 너무 부족해서 제염소를 많이 설립했다. 이로 인해 취직할 수 있는 일자리을 만들어주고 그 외에 많은 주민들이 제염 설비 건설에 돈을 벌었다. 하지만 직접 바닷물에서 소금을 추출할 수 있는 기술 개량 후에 제염소는 다시 황무지로 되었다.<br />  전후 일본의 발전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는 바로 생산 확대에 필요한 전력 개발이었다. 大正시기에 猪苗代水力발전소가 개발되고 京浜공업지역에 송전하여 전국에서도 손꼽은 전력현電力県이었다.1950년대 新潟県과 경쟁중에  只見川전원개발권을 장악했다. 新潟県를 이긴 결정적인 원인은 바로 중앙정치계와의 connection이었다. 그래서 반反중앙 반反관료를 주장한 大竹도 중앙과의 connection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그 후계자로서 관료 출신인 齊藤를 적극적으로 추천했다. 한편 도시의성장이 빠를수록 농업이 쇠퇴되고 무라에서 밖으로 취직하러 나간 젊은이의 유출 ,과소화,고령화등 심해졌다.  <br />1955년에 원자력 기본법을 제정하고 1957년에 후쿠시마현에서 선출한 참의원 의원이고 원발 지사로 불러온  木村守江는 다른 자치체가 아무 행동없는 상태에서 후진현에서 벗어날 것을 목표로 가장 먼저 원발 유치에 나섰다. 大熊町의회에서 원발 유치의 뜻을 표하고 무라는 원발을 필요하다고 표시했다. 이제 원발 실현의 가장 큰 문제는 입지 문제이었다. 木村는 횡무지로 된 소금밭을 활용한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br />  위의 과정을 겪어 후쿠시마에 원발이 건설되어 원발 무라가 나타났다. 본래 동경전력 제일,제이원발밖에 동북전력이 浪江町・小高町（現・南相馬市)에 원발을 계획하지만 현지 반대 때문에 정체상태이었다.<br />
<br /><br />Posted at Mon Oct 03 14:34:08 UTC 2011<br />]]></description>
<link>http://www.lang-8.com/181809/journals/1123729</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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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creator>aiai</dc:creator>
<pubDate>Mon Oct 03 14:34:08 UTC 2011</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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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aiai : 고쳐 주세요 ,너무 감사합니다.  (2)</title>
      <description><![CDATA[

이 글의 내용을 간단하게 읽고 나서 미국의 중국 근현대사 연구는 주로 중국과 미국 그리고 서구의 상호작용 과정에서 분석한 것 같다. 단독적인 중국이 아니라 관계사 중의 중국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은 서구의 무력으로 국문을 열게 되지만 이 것때문에 근대 문명과 사상을 접하게 되고 경제 성장을 자극한다는 서구의 영향력에서 출발하여 중국 근대 발전 과정과 원인을 분석한 미국 학자들이 많다. 즉 제 삼자의 시각으로 중국 근현대사를 분석한 것이 아니라 참여자의 입장으로 중국 현대사를 분석한 느낌이 든다. <br /><br />중미양국은 파트너이자 라이벌이기도 해서 양국 관계는 안정한 상태를 유지할 수 없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화적이지만 그 속에 이미 파란만장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런 정세에서 상대방의 모든 것을 잘 알아야 우세를 차지할 수 있고 이길 수 있다, 그래서 미국의 중국 연구는 이 것밖에 없다고 생각하면 큰 잘못이다. 아마 미국의 중국 연구는 어느 나라 보다 더 잘하고 더 구체적이고 더 다양하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이런 연구 성과는 일반 사람들에게 공개할 수 없는 비밀이다. <br /><br />
<br /><br />Posted at Thu Sep 29 01:04:37 UTC 2011<br />]]></description>
<link>http://www.lang-8.com/181809/journals/1117594</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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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creator>aiai</dc:creator>
<pubDate>Thu Sep 29 01:04:37 UTC 2011</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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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aiai : 또 부탁을 해야 해요...... (0)</title>
      <description><![CDATA[

paul cohen 출현하기 전에 미국의 중국 근현대사 연구는 주로 서양을 중심으로 하고 서양의 충격을 받고 그 충격에 대한 중국의 reaction리액션에 중점을 두고 논술했다. paul cohen는 중국을 중심으로 하고 중국 내부의 요소에 중점을 두고 발표한 논문은 미국의 중국근현대사 학계에 큰 변화를 일으켰다. 원인은 세가지가 있다. 하나는  미중관계 완화와 개혁개방등 정치적인 변화에 따라 양국 학자와 학생간의 교류가 활발해지고 중국어나 중국 연구에 관심이 가진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다. 또 한나는 중국의 연구환경의 변화이다. 마지막으로 새로운 문화사 연구의 대두와 세계화 역사라는 새로운 분야의 발전이라는 것이다.<br />  <br />  지은이는 근년간의 연구 동향을 파악하고 학문의 흐름에 큼 영향을 미친 연구를 제시하며 주로 영어로 작성하고 미국에서 발표한 것을 중심으로 유럽의 연구를 참고하여 영어로 발표한 중국사람의 연구도 포함시킨 방식으로 이 글을 작성했다.<br /><br />  청나라 말기에 대한 재고찰은 주로 민족 문제와 민족 역할 ,그리고  주체성 문제에 주목하고 있었다. 1950년부터 1960년까지의 중국 근현대사 연구 중에 가장 활발한 것은 19,20세기의 미국과 유럽의 충격에 대한 중국의 반응이라는 전제로 외교 문서를 토대로 집중적으로 고찰한 것이다. 외교 역사는 중국과 외부 세계의 관계를 연구한 것이 아니라 중국 역사 내부의 원동력에 눈을 돌린 것이다. 지금의 유럽과 미국의 중국 연구 중에 가장 활발하게 진행한 연구 분야는 20세기 전반기의 중국 근대성의 ‘조우’에 대한 것이다. 이 분야의 연구는 보통 도시--특히 조약항을 대상으로 경제사, 사회사, 출판문화연구, 매스미디어의 대두와 영향, 그리고 새로운 도시의 생활 스타일의 발달이라는 관점에서 근대성을 검토한다. 1960년에서 1970년까지 미국 연구자들은 중국의 농촌, 그리고 농민 운동의 과정과 충격에 대해 강한 관심을 가졌다. 문화사적인 방법론으로 신문 잡지 소설 광고등 활자 자료를 이용하고 언설을 분석한 것을 지나치게 강조한 끝에 농민과 농촌역사 연구를 이탈하다. 자료 부족이나 농민에 관한 문자 기록의 상실, 그리고 정부 보관 문서의 비공개도 원인으로 볼 수 있다. 1949년부터 1970년대까지 냉전체제 속에 대립 관계를 유지한 중국과 미국이란느 정세때문에 미국 학자들은 1949년을 역사 고찰의 끝이라고 보게 된다. 당연히 양국관계가 왼화되면서 중국 현지 답사와 교류등 활발하게 진행하기 때문에 새로운 도약을 얻었다.<br /><br />  이 글의 내용을 간단하게 읽고 나서  미국의 중국 근현대사 연구는 주로 중국과 미국 그리고 서구의 상호작용 과정에서 분석한 것 같다. 단독적인 중국이 아니라 관계사 중의 중국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은 서구의 무력으로 국문을 열게 되지만 이 것때문에 근대 문명과 사상을 접하게 되고 경제 성장을 자극한다는 서구의 영향력에서 출발하여 중국 근대 발전 과정과 원인을 분석한 미국 학자들이 많다. 즉 제 삼자의 시각으로 중국 근현대사를 분석한 것이 아니라 참여자의 입장으로 중국 현대사를 분석한 느낌이 든다. <br />  <br />  중미양국은 파트너이자 라이벌이기도 해서 양국 관계는 안정한 상태를 유지할 수 없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화적이지만 그 속에 이미 파란만장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런 정세에서 상대방의 모든 것을 잘 알아야 우세를 차지할 수 있고 이길 수 있다, 그래서 미국의 중국 연구는 이 것밖에 없다고 생각하면 큰 잘못이다. 아마 미국의 중국 연구는 어느 나라 보다 더 잘하고 더 구체적이고 더 다양하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이런 연구 성과는 일반 사람들에게 공개할 수 없는 비밀이다. <br />
<br /><br />Posted at Wed Sep 28 15:36:37 UTC 2011<br />]]></description>
<link>http://www.lang-8.com/181809/journals/1117177</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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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creator>aiai</dc:creator>
<pubDate>Wed Sep 28 15:36:37 UTC 2011</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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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aiai : 아...교수님 한번 봐주세요. 이번 수업 토론도 잘 준비하지 못하고 .......살려줘 (1)</title>
      <description><![CDATA[

원발은 양면성이 있지만 그 우월성과 친환경 면을 계속 강조하고 추진해온 정부와 동경전력회사등에 대해 믿음이라는 것이 있어서 때로는 리스크를 의식하지만 이런 믿음 때문에 혼란이 아니라 안정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사실은 3.11원발전에 일본에서 크고 작은 원발 사고가 발생했지만 무라외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놀람와 불안에 비해 무라들의 냉정한 태도에서 이런 안정질서를 엿볼 수 있다. 탈원발운동 있기는 있지만 그린 에너지와 첨단기술으로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추진해 온 국가 정책과 경제 발전의 필요성 때문에 이런 탈원발운동은 국가의 압력을 받은 동시의 무라들의 이해를 얻을 수 없는 상태에서 효과는커녕 오히려 혼란을 일으킨다. 이에 반대하여 원발 무라는 안정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br />  연구방법으로써 서류나 통계 자료뿐만 아니라 현지 답사도 진행시키고 질적인 조사와 분석을 토대로 중앙-지방-무라 라는 위계관계에 무라의 시각으로 지방과 중앙을 분석한다. 무라에서의 현지조사, 그리고 지사와의 인타뷰를 통해 억압과 변혁에서 벗어나고 당사자의 경험에 주목해야 한다고 인식했다. 하지만 책에서 제공한 차트를 보면 독자로서 지은이는 이를 통해 이끌어내 결론을 이해하지 못한다. 지은이는 원발과 관계없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조사을 진행해야 한다 했다. 먼저 피조사자의 인원수는 12명밖에 없고 그들의 발언을 인용하고 서술할 때 제공한 차트의 자료와 대응하지 못한다. 검증할 수 없게 된다. 당연히 지은이의 입장을 찬성하기 어렵다.<br />  지금까지 제가 이 책을 보고 인상적인 것은 바로 무라들이 원발을 포웅한 것이다. 과연 대부분의 무라들이 지은이 말하는 것처럼 원발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인가? 이런 것에 대해 지은이의 구체적인 조사 결과는 제시하지 않고 그냥 몇몇 사람들의 발언을 인용해 납득하기가 좀 어렵다. 지은이는 자신이 2006.7에서 2007.11까지 현지답사를 진행한 것을 강조하지만 그보다 더 구체적이고 효율적인 방식으로 답사결과를 표현하면 더 설득력이 있지 않은 가? <br />  올해는 티베터는 평화적으로 해방한 지 벌써 60년이 됐다. 신문이나 뉴스를 보면 티베트 주민들이 이전보다 훨씬 좋은 생활 ,좋은 시설에서 좋은 복리를 받고 있다. 하지만 외국의 보도를 보면 티베트 사람들이 독립하고 싶다, 티베트 사람들이 아직은 억압을 받고 자유가 없다고 한다. 이런 것을 규명하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현지에 가보는 것이다. 하지만 전세계사람들에게 다 믿기 위해 다 티베트에 가라는 것인가? 우리는 어떻게 조사 결과를 다른 사람들에게 잘 전달하고 현지에 온 진실감을 줄 수 있는 가? 이것은 제가 앞으로 노력해야 하는 것 중에 하나이다. <br />  그리고 요즘 일본 신문을 보면 일본 무라들이 이번 위기를 계기로 삼고 재기를 도모한다고 보도했다. 예를 들면 대양 에너지 시설을 도입하거나 무공해 채소 재배하거나 하는 것이다. 이 것은 역시 지은이는 말하는 3.11후에도 원발을 추진한 것을 요구한 점과 좀 다른다. 지금 아직은 많이 읽지 못해서 잘 이해를 못하지만 이 책을 읽어가면서 지은이와 공감대를 얻을 수 있기를 바란다.  <br />
<br /><br />Posted at Tue Sep 27 15:34:56 UTC 2011<br />]]></description>
<link>http://www.lang-8.com/181809/journals/1115730</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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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creator>aiai</dc:creator>
<pubDate>Tue Sep 27 15:34:56 UTC 2011</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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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aiai : 고쳐 주세요 ,너무 감사합니다.  (0)</title>
      <description><![CDATA[

대륙에서의 중화민국 역사 연구와 대만에서의 중국근현대사연구 <br /><br />1.시작하며 <br />대륙은 '하나의 중국'이라는 입장에서 대만은 분할할 수 없는 우리 영토의 일부분이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대만과 대륙을 하루빨리 통일될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오늘 대륙에서와 대만에서의 중국 현대사의 연구를 통해 역사 측명에서 대륙과 대만의 공통점을 찾을 수 있는 것을 기대하고 또한 공통점을 토대로 양지 국민간의 교류가 더 활발해 지는 것을 바란다.<br /><br /><br />4.나가며<br />  두글은 연구 주체 ,연구 대상, 연구 자료, 연구 입장등에 대하여 서술하고 앞으로의 연구에 대한 기대와 요구도 표명했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성과를 얻은 상황에서 일반 민중들에게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 가? 또는 이런 연구성과는 일반인들에게 보급이 된 것에 대해 좀 공금하다. 중국 대학생으로서 나는 실감하지 못한다. 중국 대학생들은 필수과목은 중국근현대사와 철학이고 대학원 입학 시험에서 이런 것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10년전이나 지금이나 역사 교과서는 똑같고 연구 성과가 학생들의 교과서에서 반영되지 못한다. 예를 들면 나는 공부한 중국근현대사는 거의 위에서 말한 혁명역사관에서 출발한 역사연구와 비슷하다. 역사 교육은 이미 정치가들의 일종 통치 수단이고 세뇌교육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정세에 나쁜 영향을 미친 사건들은 거의 교과서에서 물론이고 인터넷에서 아예 다 삭제되고 관련된 글을 인터넷에 업로드할 수 없게 통제되어 있다. 예를 들면 1989년 천안문 사건에 대한 것 검색할 수 없고 동아시아 정세 때문에 '동아'라는 글자에 아주 예민하다. 그밖에 안타까운 것은 매일 매일 대만은 우리 영토에서 분할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강조하지만 중국 근현대사책에서 왜 1949년 후의 대만에 관한 내용이 거의 없는 것인가? 나는 삼성전자와 합작관계였던 대만 기업ASUS에 한 개월동안 일해 봤다, 많은 대만 사람들과 회식을 할 때 거의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 수 없고 대화의 공통점이 없는 것은 정말 안타가웠다. 그리고 매월의 초하루와 보름에 회사 정문 앞에 제사를 하는 것에 아주 신기하다고 생각한다. 사회의 중견이 된 중국 대학 졸업생들은 학교에서 대만은 아직 낯선 존재이고 대만에 관한 교육은 아직은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실감해서 대만과 활발한 교류를 위해 개인의 노력뿐만 아니라 정부도 정치 구호만 부르지 말고 더 실질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br />
<br /><br />Posted at Thu Sep 22 03:12:22 UTC 2011<br />]]></description>
<link>http://www.lang-8.com/181809/journals/1108019</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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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creator>aiai</dc:creator>
<pubDate>Thu Sep 22 03:12:22 UTC 2011</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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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aiai : .. (0)</title>
      <description><![CDATA[

ふたつの「原子力ムラ」のひとつは、すっかり知れ渡った電力業界・学者・行政・政治家・マスコミが一体となって原発を推進してきた「ムラ」。もうひとつは、原発を受け入れ、交付金や雇用の拡大、臨時労働者の流入によって潤ってきた、文字通り地元の「ムラ」。開沼は、この中央と地方ふたつの「ムラ」の生成の歴史と構造を、主に地元の「ムラ」の側から考察している。<br /><br />여기서 말한 원자력 마을이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동경전력회사.,학자,행정기관,정치가.매체가 동일체로서 원발을 추진해 온 마을이고 또 하나는 원발을 받아들여 교부금이나 고용의 확대, 임시 노동력의 유입등으로 인해 생활이 넉넉해 진 지방 마을이다.開沼는 중앙과 지방의 두가지 마을의 발생 역사와 구조를 특히 지방의 마을에 중점을 두고 현장 답사를 진행하면서 고찰한 글이다. 
<br /><br />Posted at Tue Sep 20 22:34:31 UTC 2011<br />]]></description>
<link>http://www.lang-8.com/181809/journals/1106263</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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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creator>aiai</dc:creator>
<pubDate>Tue Sep 20 22:34:31 UTC 2011</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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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aiai : 『フクシマ』論 의 독후감(그냥 훑어보기에 .......)수업 과제이니까 문법적인 잘못을 부탁합니다. (2)</title>
      <description><![CDATA[

후쿠시마 제이원전 사고가 발생한 후 출판한 ‘후쿠시마론’ 「『フクシマ』論이라는 책은 사람의 눈길을 끌고 있다. 이 책은 지은이 도쿄대학교 대학원의 사회학과 재학 시기의 석사논문이고 올해 연초年初 작성했다, 그 후에 3.11사태 발생하고 지도 교수님등 사람의 제의와 추천을 받고 이미 쓴 본문의 앞부분에 머리말, 뒷부분에 보장補章을 덧붙이고 출판했다.<br />부표제에서 아시다시피 이책의 중심은「原子力ムラはなぜ生まれたのか」 ‘원자력 군(群？)왜 생기는 가?’에 대한 고찰이다. 근대의 최첨단 기술인 원자력은 지방의 사람들에게 이익과 행복을 가질 수 있는 동시에 이 행복을 완전히 부쉬어버릴 수 있는 위험성도 안고 있는다. 하지만 먹고 사는 일조차도 힘든 상태에서 이런 위험성은 당연히 무시할 수 있다. 후쿠시마는 지방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원발을 받아드린 과정을 지역 사회 측면에서 논리적의로 파악했다. <br />이미 전쟁 전기부터 지방은 중앙의 ‘부품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드려 중앙을 자발적으로 복종하고 근대화를 달성하고 중앙을 support해 왔다. 원발(원자력 발전소)을 받아드린 것도 근대화로 진입한 하나의 수단에 지나치 않다. 그리고 지방 사람들이  이것에 대해 찬성/반대 라는 이분법이 아니라 愛鄉/非愛鄉애향/비애향 이라는 이론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반대파조차 이런 논리로 인해 원발을 ‘포옹抱擁’하게 된다. 즉 원발 추진을 반대한 사람도 고향을 사랑한 사람이라서 고향을 발전시키기 위해 원발을 추진해야 하는 태도 전환이다. 그러므로 원발을 설립되고 ‘무라’들은 원발에 의존하여 살아왔다. 의존하기 보다는 지은이는 addiction라는 단어를 사용했다.<br />Addiction는 하나의 중독성이다. 지방 ‘무라’는 빈곤한 상태에서 빠져나가고 지방 경제를 발전시키려는 자기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원발을 받아드리면서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변화를 많이 가졌다. 원발을 수립했을 때 돈이 많이 들였지만 그 후에도 계속을 고정자산세의 세금저하나 시설의 유지maintenance등으로 돈이 많이 필요해서 재정적인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더 많은 원발을 요구하게 된다는 악순환에 빠진다.    경제적의로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이런 addiction형상이 침투돼 버렸다. 예를 들면 ‘원자력モナカ’라는 지방 명산품을 팔고 있고 ‘회전수시atom’라는 김밥집이 있다. 도쿄 사람 보기에는 좀 신선한 느낌이 들지만 지방 ‘무라’에게 이것은 이미 핏줄 속에 녹아있는 것처럼 아주 일상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br />이런 addicton형상에서 우리는 원발은 얼마나 ‘무라’에게 침투된 지, ‘무라’들에게 원발이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를 알게 된다.  3.11전에 이런 원발에 대한 행복감을 유지하고 3.11후에 이런 행복감을 다시 찾기 위해 요구하고 있다.  3.11이후 원발 반대한 것이 아니라 다시 복구해야 하는 요구에 우리는 다시 한번 이런 addiction를 실감했다.  <br />3.11사고 이후 반反 원발 시위가 벌이고 원발이 있어야 없어야 하는 문제에 대해 논쟁했다. 소용있어? 시위가 벌이기에 원발의 피해가 줄일 수 있는 것인가? 이런 때 우리는 먼 눈으로 원발과 ‘무라’의 공존을 도모해야 한다. 먼저 후쿠시마에서 이미 원발을 수립하고 그리고 그 원발에 의존한 ‘무라’들이 많은 것을 전제로 봐야 한다. 이런 예상하지 못한 사고가 발생한 후 우리는 앞으로 이런 사고를 어떻게 방지하고 어떻게 가장 짧은 시간에 이런 사고의 피해을 줄일 수 있는 것에 힘써야 하지 않는 것인가?         지은이는 원발을 비롯해 과학기술과 일류의 모순과 공존 측면에서 발생한 사화적인 문제를 제시했다. 이런 문제에 대한 대책을 마련한 것은 누구의 책임인가? <br /> <br />
<br /><br />Posted at Tue Sep 20 06:50:16 UTC 2011<br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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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Date>Tue Sep 20 06:50:16 UTC 2011</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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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aiai : 북한 건국헌법의 채택과정과 성격, 이후 변화 (0)</title>
      <description><![CDATA[

북한 건국헌법의 채택과정과 성격, 이후 변화<br />1.시직히며<br /> 북한 건국헌법의 채택과정을 잘 알려면 먼저 그시기(1945.8.15-1948.9.9)의 대사건을 간단하게 설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br /><br />1945년에 일본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자 한반도가 해방되었다. 온 국민 승전과 행방의 기쁨에 잠겨 있고 한반도의 정치적이고 지리적인 요소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독립정부 수립할 구체적인 계획과 합의를 하지 못했다. 결국은미국과 소련이라는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와 정치 구상을 가진 국가에 의하여 점령됨으로써  남북한 이념을 달리하는 국가가 설립되었다.<br /><br /> <br />1945년 멕시코에서 한반도 국민들은 승전 축제를 벌인 장면 (사진 생량)<br /><br /> <br />1945년 하와이에서 승전을 경축한 장면 <br /><br /> <br />1945년 일본에서 행방 축제<br /><br /> <br />1945년 서울에서 승전 축제<br /><br /> <br />1945년 서울에서 시민들이 미국 군대를 환영한 장면<br /><br /> <br /><br />일본에 있는 한국인들은 배 타고 귀국 장면 <br /><br /> <br />이승만 김구등 귀국했다.<br /><br />만주지역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이끌었다고 알려진 김일성등 독립운동가들은 속속 귀국했다<br />(어떤 사람은 거지처럼 옷을 입고 돌아왔고 어떤 사람은 양복 입고 비행기를 타고 돌아왔다,세사이 정말 불공평하다.ㅎㅎ)<br /><br /> <br /> 1945.12.16일 모스크바에서 삼상회의를 개최했다.12.27일 첫째 조선임시정부 수립, 둘째 미소공동위원회 설립 ,셋째 5년내로 미소영중 4개국에게 신탁 통치 실시등을 협의했다.<br />　　　　<br /><br />소련은 북한에서 모스크바 삼상 결과를 받아들이는 분위기를 조성한 것과 대조로 남한에서 온 국민이 반탁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br /><br /><br />1946.02.08일 북한 최고 권력 기관으로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결성되었고 김일성을 최고 위원장으로 전면 나서면서 우익은 거세당하고 좌익은 북한의 주도권을 완전히 잡게 되었다.<br /><br />1946.03.05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는 “북조선 토지개혁에 관한 법령”을 발표하여 북한에서 농지개혁을 단행했으므로 농민의 지지를 받고 같은 해 6원에 노동자 법령을 실시하고 노동자의 지지를 얻었다.<br /><br />1947년 02.17일에 “북조선 인민 회의”를 구성하였다.즉 ‘조선에 민주주의 임시정부가 수립되기까지 북조선인민정권의 최고기관’으로서,입법권의 행사와 더불어 제정된 법령을 집행 할 수있는 인민위원회를 조직하는 국가의 최고권력을 행사하는 기관이다.<br /><br />1946.01.16-1947.10.18일 미소공동위원회에서는 소련과 미국은 계속 정당과 사회단체의 범위와 자격 문제에 대하여 협의 못하고 제 62번째 회의에서 공식적으로 결렬되었다.　　<br /><br />1947.09.17일에 미국은 조선문제를 유엔에 제출했다. 미국은 유엔을 통한 통일 정부의 수립을 주장하였음에 비하여 소련은 미소 양국의 철수와 자주적 정부수립을 주장하였다.<br /><br /><br /><br /><br />1947.11.14일，유엔에 한반도 문제를 상정되어 자유 총선거에 의한 통일 정부 수립을 결의했다. <br /><br />1948.01.08일，유엔 조선 임시 위원회는 서울에 도착하여 총선건에 관한 것을 마련하지만 북한쪽은 이를 거부하였고 결국은 유엔은 선거 가능한 지역에서만의 선거를 결정하였다. (사실은 남조선에만)<br /><br />1948.02.08일 북로당은 “조선 인민군”이라는 군사역량을 구성했다.<br /><br /> <br /><br /><br /> <br />벽에 걸고 있는 다섯 개의 사진을 보면 북한의 정치 구상은 모스크바 협정을 지키는 것을 볼 수 있다.<br /><br />1948.4.22일 단독 선거를 반대하는 김구와 김규식을 초청하여 남북조선 56개의 정당과 사회단체 대표는 평양에서 ‘’연석회의”를 개최했다.545명 대표중에 240명은 남조선에서 온 대표다. 그러나 ,이는 결국 명분을 위한 것일 뿐 이미 남한에서의 단독선거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br /><br /> <br />1948年4月，金九穿越38线到平壤参加联合会议。<br /><br />1948.4.23일，평양 연석회의에서 단독적인 선거를 반대하고 외국 군대 철수시키고 조선 인민들이 단독적으로 민주 정부를 선거한 것을 요구했다. <br /><br /><br />1948.5.10일 남한에서 총선가 실시되었고 제헌 국회도 설립했다. <br />1948.7.17일，남조선은《헌법》을 공포하고，이승만은 한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br /> .<br />1948.8.15일，이승만은 대한민국 성립  의식에서의 담화<br /><br /><br /><br />1948.8.25일 북한에서 총선거가 실시되어 조선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 선출되었다.9.8일 내각을 구성했다.<br /><br />1948.9.9일 북조선에서 김정일을 수상으로 “조선민주주의 공화국”을 성립했다. <br />
<br /><br />Posted at Mon Sep 12 06:27:55 UTC 2011<br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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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Date>Mon Sep 12 06:27:55 UTC 2011</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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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aiai : 제일 좋아하는 노래 중 하나  :  어머님의 말을 잘 들어 .  작사작곡 by Jay   발행기간 2006 (1)</title>
      <description><![CDATA[

听妈妈的话   作词作曲：杰伦<br />어머님의 말을 잘 들어.  작사 작곡 by Jay<br />http://www.1ting.com/player/c2/player_124657.html<br /><br />http://www.tudou.com/playlist/p/l12061296.html     (10초의 광고가 있어요)<br /><br />小朋友你是否有很多问号 꼬마야 ,머리 속에 물음표 꽉 차고 있지<br />　　为什么别人在那看漫画  왜 다른 친구들이 만화를 보고 있는 데<br />　　我却在学画画对着钢琴说话 나는 그림을 배우고 비아노와 얘기를 해야 하는 지<br />　　别人在玩游戏            다른 친구들이 게임을 하고 있는 데<br />　　我却靠在墙壁背我的abc   내가 벽에 기대어 ABC를 외워야 하는지<br />　我说我要一台 大大的飞机  내가 큰 비향기를 달라고 했지만<br />　　但却得到一台 旧旧录音机  낡은 녹음기를 받았는지<br />　　为什么要听妈妈的话       왜 어머님의 말을 잘 들어야 해<br />　　长大后你就会开始懂了这段话 커지면 이말을 이해할 수 있어<br />　　长大后我开始明白         어른이 된 후 내가 알게 됐어.<br />　　为什么我跑得比别人快    내가 왜 다른 친구보가 앞에 달리고 있고 <br />　　飞得比别人高           다른 친구보다 더 넓은 세상을 누릴 수 있는 지를<br />　　将来大家看的都是我画的漫画 앞으로 사람들은 본 만화는 다 내 작품이고  <br />　　大家唱的都是我写的歌      사람들이 즐겨 부른 노래는 다 내가 쓴 곡이네<br />    <br />妈妈的辛苦不让你看见  어머니는 고생을 보여 주지 않아<br />　　温暖的食谱在她心里面 따뜻한 요리책은 어머님의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어<br />　　有空就多多握握她的手 시간이 나면 어머님의 손을 자주 잡아라<br />　　把手牵着一起梦游     손에 손 잡고 같이 꿈 속에서 노닐자<br />　　听妈妈的话别让她受伤 어머님의 말을 잘 듣고 상처 주지 마.<br />　　想快快长大才能保护她 빨리 켜서 어머님을 지킬 수 있잖아.<br />　　美丽的白发幸福中发芽 아름다운 흰 머리는 행복 속에서 싹트고 있어<br />　　天使的魔法温暖中慈祥 천사의 마법처럼 따뜻하고 자상해.<br />　　<br /><br />在你的未来音乐是你的王牌 앞으로 음악은 너의 가장 강력한 카드이고<br />　　拿王牌谈个恋爱 이 카드를 가지고 연애할 수도 있어<br />　　唉我不想把你教坏 아이구…좋지 않은 것을 가르치기 싫어.<br />　　还是听妈妈的话吧  어머님의 말을 잘 들어<br />　　晚点再恋爱吧      좀 늦게 연애해<br />　　我知道你未来的路 네가 가야 하는 길을 내가 알지만 <br />    <br />但妈比我更清楚 어머님은 나보다 더 잘 알고 있겠죠<br />　　你会开始学其他同学在书包写东写西 너는 다른 친구처럼 책방에서 낙서하지만 <br />　　但我建议最好写妈妈我会用功读书”어머님,제가 공부를 열심히 할 게요.” 이렇게 쓰는 것을 권해.<br />　　用功读书怎么会从我嘴巴说出 열심히 공부하겠다는 말은 어떻게 제 입 속에서 나왔어.<br />　　不想你输所以要叫你用功读书 네가 지는 것을 원하지 않아서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그랬어요.<br />　　妈妈织给你的毛衣你要好好的收着 어머님께서 짜 낸 스웨트를 잘 간직해야 해<br />　　因为母亲节到时我要告诉她我还留着 왜냐하면 어버이날에 어머님에게 제가 아직 간직하고 있다고 알려 주어야 하기 때문이야<br />　　对了我会遇到周润发 맞다.내가 주윤발을 만날 거야<br />　　所以你可以跟同学炫耀赌神未来是你爸爸 그래서 친구들에게 도신은 내 아버지라고 자랑할 수 있어<br />　　我找不到童年写的情书 어렸을 때 쓴 연애 편지를 찾을 수 없어<br />　　你写完不要送人因为过两天你会在操场上捡到 쓰고 나서 보내지 마,왜냐하면 몇일 후에 운동장에서 주울 수 있어<br />　　你会开始喜欢上流行歌 유행곡을 좋아하게 될 거야<br />　　因为张学友开始准备唱吻别 장학우는 kiss goodbye 부르기 시작하기 때문이야<br />　　听妈妈的话别让她受伤 어머님의 말을 잘 듣고 상처 주지 마.<br />　　想快快长大才能保护她 빨리 켜서 어머님을 지킬 수 있잖아.<br />　　美丽的白发幸福中发芽 아름다운 흰 머리는 행복 속에서 싹트고 있어<br />　　天使的魔法温暖中慈祥 천사의 마법처럼 따뜻하고 자상해.<br />　　<br /> <br />　　听妈妈的话别让她受伤 어머님의 말을 잘 듣고 상처 주지 마.<br />　　想快快长大才能保护她 빨리 켜서 어머님을 지킬 수 있잖아.<br />　 长大后我开始明白         어른이 된 후 내가 알게 됐어.<br />　　为什么我跑得比别人快    내가 왜 다른 친구보가 앞에서 달리고 있고<br />　　飞得比别人高           다른 친구보다 더 넓은 세상을 누릴 수 있는 지를<br />　　将来大家看的都是我画的漫画 앞으로 사람들은 본 만화는 다 내 작품이고  <br />　　大家唱的都是我写的歌      사람들이 즐겨 부른 노래는 다 내가 쓴 곡이에요<br />  <br />妈妈的辛苦不让你看见  어머님은 고생을 보여 주지 않아<br />　　温暖的食谱在她心里面 따뜻한 요리책은 어머님의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어<br />　　有空就多多握握她的手 시간이 나면 어머님의 손을 자주 잡아라<br />　　把手牵着一起梦游     손에 손 잡고 같이 꿈 속에서 노닐자<br />　　听妈妈的话别让她受伤 어머님의 말을 잘 듣고 상처 주지 마.<br />　　想快快长大才能保护她 빨리 켜서 어머님을 지킬 수 있잖아.<br />　　美丽的白发幸福中发芽 아름다운 흰 머리는 행복 속에서 싹트고 있어<br />　　天使的魔法温暖中慈祥 천사의 마법처럼 따뜻하고 자상해.<br />　　<br /><br />
<br /><br />Posted at Mon May 23 03:30:29 UTC 2011<br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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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Date>Mon May 23 03:30:29 UTC 2011</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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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aiai : 장점과 단점  (3)</title>
      <description><![CDATA[

1.장점은 한 가지 일을 하면 끝까지 책임지고 만족한 결과를 이룰 때까지 노력한 것입니다.<br /><br />2.단점은 한 가지 일에 너무 지나치게 열중한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요즘 친구와 탁구를 치고 있습니다. 게임이란 것을 알면서도 지는 것이 너무 싫어서 최선을 다해 연습하고 있어요.<br /><br />3.<br />졸업 후 중국 식당restaurant?을 운영할 계획입니다. 중국의 전통적이고 건강한 식품을 많은 사람들에게 좋아하게 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정기적으로 식품 영양에 관한 지식을 보급하겠습니다.<br /><br />4.대학 때 공부도 열심히 했지만 그에 못지 않게 봉사활동도 많이 해 봤습니다.예를 들면 돼지 독감이 창궐했을 때 저는 대련 공항에서 외국에서 오신 분들에게 서류 번역을 하고 신체 검사를 담당하고 있었습니다.제가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주었다기 보다는 제가 더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br /><br />Posted at Fri May 20 09:35:06 UTC 2011<br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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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Date>Fri May 20 09:35:06 UTC 2011</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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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aiai : 행복하세요? (3)</title>
      <description><![CDATA[

有一个人, 他生前善良且热心助人,所以在他死后, 升上天堂, 做了天使。他当了天使后, 仍时常到凡间帮助人, 希望感受到幸福的味道。 어떤 사람은 살아있는 동안 마음이 착하고 따뜻해서 죽은 후에 천당에 올라가고 천사가 되었다.천사가 된 후도 자주 인간 세상에 내려와서 사람들을 행복을 느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br />一日, 他遇见一个农夫, 农夫的样子非常困恼, 他向天使诉说︰“我家的水牛刚死了, 没它帮忙犁田,那我怎能下田作业呢？“ 어떤 날 그는 고민스러워 보인 농부를 만났다. 농부는 천사에게 “우리 집의 소는 방금 죽어서 소가 없으면 어떻게 농사를 지을 수 있어요?’라고 빌었다. <br />于是天使赐他一只健壮的水牛, 农夫很高兴, 天使在他身上感受到幸福的味道。 그래서 천사는 농부에게 건장한 소 한 마리를 선사했다. 농부는 기분이 매우 좋아서 천사는 농부에게서 행복한 맛을 느꼈다.<br />又一日, 他遇见一个男人, 男人非常沮丧, 他向天使︰“我的钱被骗光了, 没盘川回乡。” 또 어느 날 의기소침한 남자를 만났다. 남자는 제 돈을 다 속여 빼앗어 고향에 돌아가는 돈이 없다고 천사에게 호소연했다.<br />于是天使给他银两做路费, 男人很高兴, 天使在他身上感受到幸福的味道。 그래서 여비로 돈을 주었다. 천사는남자의 웃음에서 행복을 느꼈다. <br />又一日, 他遇见一个诗人, 诗人年青、英俊、有才华且富有, 妻子貌美而温柔, 但他却过得不快活。또 어느 날 한 시인 만났다. 신인은 젊고 잘 생겼며 재능이 넘치고 돈도 많다. 뿐만 아니라 아내도 예쁘고 부드럽다 .하지만 시인은 행복하지 않다.<br />天使问他︰“你不快乐吗？我能帮你吗？”천사는 “행복하지 않아요?내가 도움이 될 수 있어요?’라고 말을 건넸다.<br />诗人对天使说：“我什么也有, 只欠一样东西, 你能够给我吗？”시인은 제가 모든 것을 가졌지만 단 하나 없을 뿐이에요. 갖다줄 수 있어요?’라고 천사에게 말했다.<br />天使回答说︰“可以。你要什么我也可以给你。”천사는 당연하져.말해 봐요. 뭣든지 가지려면 줄 수 있어요.’라고 대답했다.<br />诗人直直的望着天使︰“我要的是幸福。”시인은 우두커니 하늘을 쳐다보고  내가 행복을 원한다고 했다.<br />这下子把天使难倒了, 天使想了想, 说︰我明白了。”천사가 곤란하게 되었다. 좀 생각을 하다가 “네 ,알겠어요.”라고 말한 후에 <br />然后把诗人所拥有的都拿走。 <br />天使拿走诗人的才华, 毁去他的容貌, 夺去他的财产, 和他妻子的性命。 천사는 시인의 재능 생김새 재산 그리고 시인 아내의 목숨등 모든 것을 가져 가고 떠났다.<br />天使做完这些事后, 便离去了。 <br />一个月后, 天使再回到诗人的身边, 한 달 후에 천사는 시인 옆에 돌아왔다. 시인은 옷이 남루하고 굶어죽을 상태로 바닥에서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br />他那时饿得半死, 衣衫褴褛地在躺在地上挣扎。 <br />于是, 天使把他的一切还给他。 그래서 천사는 모든 것을 돌려 주었다. 그리고 떠났다. 보름 후에 천사는 또 시인을 찾았다. 이번에 시인은 아내를 안고 천사에게 감사의 말을 끊지 않았다.왜냐하면 행복을 느꼈다.<br />然后, 又离去了。 <br />半个月后, 天使再去看看诗人。 <br />这次, 诗人搂着妻子, 不住向天使道谢。 <br />因为, 他得到幸福了。 <br />你曾觉得孤独？你尝过幸福的味道？ 孤寂、璀璨本就是形容词, 所有的形容词都是比较的。 没尝过孤寂, 又怎知何谓璀璨的人生？ 孤寂又岂非人生之必经？ 人很奇怪, 每每要到失去, 才懂得珍惜。 其实, 幸褔早就放就在你的面前。 肚子饿坏的时候, 有一碗热腾腾的拉面放在你眼前, 幸福。 累得半死的时候, 扑上软床软的, 也是幸福。 哭得要命的时候, 旁边温柔的递来一张纸巾, 更是幸福。 幸福本没有绝对的定义, 平常一些小事也往往能撼动你的心灵, 幸福与否, 只在乎你的心怎么看待。외로운 느낌을 해 봤을 까? 행복의 맛을 맛봤을 까?  외로움을 느낀 적이 없으면 어떻게 행복의 맛을 알 수 있을 까? 사람이란 이상하게도  무엇을 잃어버린 후에야 그 소중함을 알게 된다. 사실은 행복이란 바로 눈 앞에 있다는 것이다. 굶을 때 따끈따끈한 라면 한 그릇이 있으면 행복한다. 힘들어 죽을 때 푹신푹신한 침대에 누워 있기만 하면 행복한다. 슬퍼서 펑펑 울 때 옆에서 부드럽게 건네준 한 장의 티슈에  행복을 느낀다.행복이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일어난 사소한 일이라도 마음에 닿을 수 있는 힘을 가진다. 행복이든 말든 마음이 어떻게 다루느냐에 달려 있다.<br /><br />
<br /><br />Posted at Tue Jan 04 11:48:39 UTC 2011<br />]]></description>
<link>http://www.lang-8.com/181809/journals/751333</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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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Date>Tue Jan 04 11:48:39 UTC 2011</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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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aiai : 헤어지면 안 돼요. (0)</title>
      <description><![CDATA[

 캐나다 구베크에 남북 쪽으로 뻗어있는 산골짜기가 있다. 특별한 데가 없지만 유일하게 눈에 띄는 것은 바로 서쪽 언덕에서 소나무나 잣나무 등 여러 가지 나무들이 많이 자라고 있지만 동쪽 언덕에서 히말라야삼목밖에 없다. 많은 사람들이  이 신기한 경치의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지만  뜻밖에도 한 부부는 이 수수께끼를 풀었다.<br /> 1993년 의 겨울의 일었다. 이 부부의 관계는 파열 직전에 처하고 있었다. 옛사랑을 되찾기 위해 같이 낭망적인 여행을 떠나자고 했다. 다시 되찾으면 결혼 생활을 계속하고 아니면 헤어지자고 약속했다. 그들은 이 산골에 왔을 때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그래서 텐트를 치고  하늘의 곳곳에서 날리는 눈송이을 바라보고 바람 방향이 좀 특별한 것을 발견했다. 동쪽 언덕의 눈이 서쪽에 비해 세고 많다. 얼마 안돼서 히말라야삼목에 눈이 두껍게 덮여 있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에 이르면 히말라야삼목의 탄력이 많은 나뭇가지는  눈이 그 위에서 미끄러져 내려가도록 아래고 구부렸다. 이렇게 떨어뜨리다가 덮이고 덮이다가 떨어뜨렸다. 결국은 히말라야삼목은 멀쩡하게 살아남았다 , 다른 나무들은 이런 재주를 갖지 않아서 쌓인 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서 부러졌다. 아내는 이 경관을 발견하고 남편한테 “동쪽 언덕은 옛날에 틀림없이 다른 나무들이 자라고 있었을 거야, 다만 구부릴 줄 몰라서 큰눈에 없어진 거같아.’라고 말했다. 잠시 후에 둘이 무엇을 깨달았는 것같아  껴 안고 있었다.<br /> 생활에서 우리는 여러가지 스트레스를 받고 있서 견디기 힘들 정도로 많이 쌓이는 것이다. 이럴 때 우리는 히말라야삼목처럼 짐을 벗기 위해 뭄을 구부려야 한다. 이렇게 해야 부러지지 않고  다시 꿋꿋하게 설 수 있게 된다. 구부리는 것은 머리를 숙이거나 실패 인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유연한 생활 방식이고 예술이다. <br /><br />
<br /><br />Posted at Sun Jan 02 10:53:43 UTC 2011<br />]]></description>
<link>http://www.lang-8.com/181809/journals/748825</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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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creator>aiai</dc:creator>
<pubDate>Sun Jan 02 10:53:43 UTC 2011</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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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aiai : 중국어를 배우고  있는 한국분에게 부탁이 있어요. 알려주세요. 고마워요 (8)</title>
      <description><![CDATA[

왜 중국어를 배웠어요.알려주세요.<br />한류 열풍은 중국에서 세게 풀고 있는 데 혹시 한국에서도 한풍汉风이 풀고 있나요?（없는 것 같지만 확인하고 싶어요.)있으면 예를 들어주세요.고마워요.
<br /><br />Posted at Mon Dec 27 11:21:59 UTC 2010<br />]]></description>
<link>http://www.lang-8.com/181809/journals/742634</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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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creator>aiai</dc:creator>
<pubDate>Mon Dec 27 11:21:59 UTC 201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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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aiai : インターネットからの情報に対して選択力及び判断力など持つべきだと思われる、－－‘思われる’の‘われ’の使い方は何ですか？意味はなんですか？ (8)</title>
      <description><![CDATA[

インターネットからの情報に対して選択力及び判断力など持つべきだと思われる、－－‘思われる’の‘われ’の使い方は何ですか？意味はなんですか？
<br /><br />Posted at Thu Dec 23 12:03:43 UTC 2010<br />]]></description>
<link>http://www.lang-8.com/181809/journals/738665</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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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creator>aiai</dc:creator>
<pubDate>Thu Dec 23 12:03:43 UTC 201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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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aiai : 위기를 계기로 , 도전을 발전으로 만들자. (0)</title>
      <description><![CDATA[

 어느 날 농부의 한 마리 당나귀는 부주의하여  마른 우물에 떨어졌다. 몇시간이 지나도 농부는 온갖 생각을 짜내도 어떻게 구해야 할지 모르고 당나귀의 슬픈 우짖음만이  우물에 감돌고 있었다. 결국은 농부는 포기했다. 이 늙은 당나귀를 구하는 것이라면 이렇게 많은 힘을 들릴 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이 마른 우물은 너무 위험해서 메워야 하겠다고 생각해서 이웃 사람을  불러 와서 우물을 메운 것을 도와주라고 부탁했다. 우물을 메운 김에 당나귀를 같이 산 채로 묻을 것었다. 당나귀의 고통을 줄릴 수 있어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br /> 이웃 사람들은 각자 한 삽을 들고  메우기 시작했다. 당나귀는 자신의 처지를 아는 듯이 더 슬프게 우짖기 시작했다. 하지만 뜻밖에 잠시 후에 당나귀는 조용해졌다. 농부는 궁금해서 머리을 내밀고 우물 밑바닥으로 내려다보고 눈 앞의 상황에 놀랐다. 당나귀의 등에 흙이 떨어지자 몸을  흔들어 흙을 우물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다음에 그 흙 위로 올라 섰다. 이러게 반번해서 얼마 안 돼 당나귀는  우쭐거리면서 우물 입구에 올라왔다. 사람의 놀람 속에 빠르게 달아났다.<br /><br /> 우리는 생며의 여정에 당나귀처럼 ‘마른 우물’에 떨어지고  여러가지 ‘흙’을 맞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른 우물’에 벗어나는 비결은 바로 ‘흙’을 떨러뜨리고 그위에 선 것이다. 사실은 우리는 생활에서 겪은 여러가지 어려움과 죄절은 우리 몸에 떨어진 '흙'이 아닐 까? 하지만 시각을 바꿔 보라! 그 ‘흙'을 발판으로 볼 수도 있다. 중도에 그만두지 않고 단단하게 물리치고 그위에 올라가기만 하면 가장 깊은 우물에 떨어져도 무사히 살아날 수 있다. 당나귀을 산 채로 묻 은것처럼 보이지만 어려움에 대한 당나귀의 태도가 달라져서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다. 우리도 적극적이고  침작한 태도로 궁경(어색해요?)을 대하면 궁경 속에 기회가 숨겨 있는 것을 깨달은 깃이다. 성패는 우리 자신에 달려 있어서 꿈을 향해 용감하게 앞으로 나아가자. <br /><br />
<br /><br />Posted at Tue Dec 21 12:26:37 UTC 2010<br />]]></description>
<link>http://www.lang-8.com/181809/journals/736360</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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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creator>aiai</dc:creator>
<pubDate>Tue Dec 21 12:26:37 UTC 201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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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aiai : 마음으로 통하는 길 (0)</title>
      <description><![CDATA[

철문은 한 자루 튼튼한 자물쇠로 잠가 있었다. 큰 쇠막대기는 안간힘을 써도 비틀어 열 수가 없지만(? 젖혀 열 수가 없지만?) 작은 열쇠는 자물쇠 구멍에 들어가서 살짝 돌아 문이 딱 열어진다.쇠막대기는 이해가 안 돼서 “내가 열심히 했는 데도 안 된 일은 네가 어떻게 식은 죽 먹듯이 열었느냐고 물었다. 열쇠는 왜냐하면 내가 그의 마음을 제일 알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br />남의 마음에 닿을 수 있는 교류는(어색해요) <br />인간 관계(사람과 사람 간의 교류의 뜻이에요?)<br />의 황금 열쇠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 까?<br />
<br /><br />Posted at Sun Dec 19 11:50:40 UTC 2010<br />]]></description>
<link>http://www.lang-8.com/181809/journals/733953</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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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creator>aiai</dc:creator>
<pubDate>Sun Dec 19 11:50:40 UTC 201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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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aiai : 슬프면 어떻게 해요 (0)</title>
      <description><![CDATA[

붙임성이 좋은 친구가 있다. 그는 상냥해서 회사에서 따뜻하게 사람을 대해주고 단 한번도 화난 것을 본 적이 없다. 어느날 그의 집을 지나갔을 잠깜 들렀다. 그가 옥상에서 지나간 비행기를 향해 소리를 치고 있었다. 이해가 못해서 이유를 물었다. 그는 "내 집이 공항 옆에 있잖아,매일 비행기가 뜨거나 착륙할 때마다 시끄러운 소음이 들려, 그래서 그 후에 기분이 나쁘거나 억울한 일이나 좌절을 겪으면 화나고 싶을 때는 옥상에 올라가서 지나간 비행기를 향해 소리를 친 거야. 비행기가 나의 불쾌와 불만을 함께 가져가고 사라져 버릴 것야’라고 대답했다. 돌아가는 길에 어쩐지  성질이 이렇게 좋다고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고 제때에 불만을 털어놓을 줄 알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br />불쾌감을 계속  마음 속에 억눌러서는 안된다. 생활 절주가 빠른 도시 생활에서 어떻게 정신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방법을 스스로 찾아서 몸에 배야 한다. 이렇게 해야 건강하고 여유있는 인생을 즐길 수 있지 않을 까?<br />
<br /><br />Posted at Fri Dec 17 12:24:20 UTC 2010<br />]]></description>
<link>http://www.lang-8.com/181809/journals/731855</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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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creator>aiai</dc:creator>
<pubDate>Fri Dec 17 12:24:20 UTC 201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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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aiai : 좀 길어요. 따뜻한 분을 기다리는 중 (1)</title>
      <description><![CDATA[

한 음악 학과의 학생은 연습실에 가서 피아노에 완전히 새로운 악보가 놓여 있었다. 그는 악보를 펴면서 “초 어려워”라고 중얼거렸다. 피아노의 연주 실력에 대한 자신이 밑바닥에 떨어졌다. 새로운 교수님에 따라 공부한 지 벌써 삼개 월이 지나는 데 어째서 이런 식으로 학생들을 괴롭힌가? 겨우 정신을 차려서 열 손가락이 정신없이 분전하고 있었다. …..피아노 소리는 밖에서 들려온 걸음 소리를 덮였다.<br />지도 교수님은 이름이 널리 알려진 대가이다. 수강 첫날에 그는 학생들에게 악보를 나눠 주면서 해 보라고 했다. 악보는 고난도 해서 학생들은 서툴고 잘못을 자주 해서 “아직 모자라니까 돌아가서 잘 연습하다 와”라고 수강 끝에 이렇게 당부했다. <br />다음주 수업에 교수님의 검사을 대처하기 위해 일주일 열심히 연습했지만 생각하지도 못해 지난 주의 악보에 대해 한 마다도 없고 교수님은 더 어려운 악보를 나누어 주면서 해 보라고 말했다. 학생들은 마지못해 더 어려운 악보에 도전해야 한다. <br />그 다음 다음주 또 더 어려운 악보를 받았다. 전의 상황과 비슷해 수업에서 새로운 악보에 시달리고 집에 가도 연습해야 했다가 그 다음 수업에 또 두배로 어려운 악보가 앞에 놓여 있는다.. 아무리 연습해도 교수님의 페이스pace에 따르지 못해서 학생들은 갈 수록 불안해지고 의기소침해졌다.<br />교수님이 연습실에 들어오자 학생들은 참다 못해 삼개 월 동안 왜 이렇게 우리를 괴롭히느냐고 물었다. 교수님은 대답없이 맨 처음의 악보를 꺼내 학생들에게 건네주고 확고한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해 보라고 했다. 불가사의한 일이 일어났다. 자신이 이 곡을 이렇게 아름답고 훌륭하게 칠 수 있다니 학생들도 깜짝 놀랐다. 교수님은 또 학생들에게 두 뻔째 수업의 악보를 해 보라고 학생들은 여전히 뛰어난 솜씨를 보여줄 수 있었다. 연주가 끝난 후 학생들은 우두커니 교수님을 바라보고 말이 안 나왔다. “만약에 내가 너희들에게 가장 잘하는 것을 해 보라면 아마 계속 전의 수준에 머무르고 지금의 실력에 이르지 못할 걸’라고 느리게 설명했다.<br />사람이라면 잘 알고 잘 하고 있는 것을 드러내기 좋아한다.하지만 뒤돌아보면 끊임없는 도전이나 점점 무거워진 압력 때문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여러가지 능력을 몸에 밴 것이 아닐 까?<br /><br /><br />
<br /><br />Posted at Fri Dec 17 11:25:46 UTC 2010<br />]]></description>
<link>http://www.lang-8.com/181809/journals/731818</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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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creator>aiai</dc:creator>
<pubDate>Fri Dec 17 11:25:46 UTC 201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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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aiai : 좀 길어요. 따뜻한 분을 기다리는 중 (0)</title>
      <description><![CDATA[

한 음악 학과의 학생은 연습실에 가서 피아노에 완전히 새로운 악보가 놓여 있었다. 그는 악보를 펴면서 “초 어려워”라고 중얼거렸다. 피아노의 연주 실력에 대한 자신이 밑바닥에 떨어졌다. 새로운 교수님에 따라 공부한 지 벌써 삼개 월이 지나는 데 어째서 이런 식으로 학생들을 괴롭힌가? 겨우 정신을 차려서 열 손가락이 정신없이 분전하고 있었다. …..피아노 소리는 밖에서 들려온 걸음 소리를 덮였다.<br />지도 교수님은 이름이 널리 알려진 대가이다. 수강 첫날에 그는 학생들에게 악보를 나눠 주면서 해 보라고 했다. 악보는 고난도 해서 학생들은 서툴고 잘못을 자주 해서 “아직 모자라니까 돌아가서 잘 연습하다 와”라고 수강 끝에 이렇게 당부했다. <br />다음주 수업에 교수님의 검사을 대처하기 위해 일주일 열심히 연습했지만 생각하지도 못해 지난 주의 악보에 대해 한 마다도 없고 교수님은 더 어려운 악보를 나누어 주면서 해 보라고 말했다. 학생들은 마지못해 더 어려운 악보에 도전해야 한다. <br />그 다음 다음주 또 더 어려운 악보를 받았다. 전의 상황과 비슷해 수업에서 새로운 악보에 시달리고 집에 가도 연습해야 했다가 그 다음 수업에 또 두배로 어려운 악보가 앞에 놓여 있는다.. 아무리 연습해도 교수님의 페이스pace에 따르지 못해서 학생들은 갈 수록 불안해지고 의기소침해졌다.<br />교수님이 연습실에 들어오자 학생들은 참다 못해 삼개 월 동안 왜 이렇게 우리를 괴롭히느냐고 물었다. 교수님은 대답없이 맨 처음의 악보를 꺼내 학생들에게 건네주고 확고한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해 보라고 했다. 불가사의한 일이 일어났다. 자신이 이 곡을 이렇게 아름답고 훌륭하게 칠 수 있다니 학생들도 깜짝 놀랐다. 교수님은 또 학생들에게 두 뻔째 수업의 악보를 해 보라고 학생들은 여전히 뛰어난 솜씨를 보여줄 수 있었다. 연주가 끝난 후 학생들은 우두커니 교수님을 바라보고 말이 안 나왔다. “만약에 내가 너희들에게 가장 잘하는 것을 해 보라면 아마 계속 전의 수준에 머무르고 지금의 실력에 이르지 못할 걸’라고 느리게 설명했다.<br />사람이라면 잘 알고 잘 하고 있는 것을 드러내기 좋아한다.하지만 뒤돌아보면 끊임없는 도전이나 점점 무거워진 압력 때문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여러가지 능력을 몸에 밴 것이 아닐 까?<br /><br /><br />
<br /><br />Posted at Fri Dec 17 11:24:03 UTC 2010<br />]]></description>
<link>http://www.lang-8.com/181809/journals/731814</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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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creator>aiai</dc:creator>
<pubDate>Fri Dec 17 11:24:03 UTC 201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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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aiai : 참다 못해.. (0)</title>
      <description><![CDATA[

한 음악 학과의 학생은 연습실에 가서 피아노에 완전히 새로운 악보가 놓여 있었다. 그는 악보를 펴면서 “초 어려워”라고 중얼거렸다. 피아노의 연주 실력에 대한 자신이 밑바닥에 떨어졌다. 새로운 교수님에 따라 공부한 지 벌써 삼개 월이 지나는 데 어째서 이런 식으로 학생들을 괴롭힌가? 겨우 정신을 차려서 열 손가락이 정신없이 분전하고 있었다. …..피아노 소리는 밖에서 들려온 걸음 소리를 덮였다.<br />지도 교수님은 이름이 널리 알려진 대가이다. 수강 첫날에 그는 학생들에게 악보를 나눠 주면서 해 보라고 했다. 악보는 고난도 해서 학생들은 서툴고 잘못을 자주 해서 “아직 모자라니까 돌아가서 잘 연습하다 와”라고 수강 끝에 이렇게 당부했다. <br />다음주 수업에 교수님의 검사을 대처하기 위해 일주일 열심히 연습했지만 생각하지도 못해 지난 주의 악보에 대해 한 마다도 없고 교수님은  더 어려운 악보를 나누어 주면서 해 보라고 말했다. 학생들은 마지못해 더 어려운 악보에 도전해야 한다. <br />그 다음 다음주 또 더 어려운 악보를 받았다. 전의 상황과 비슷해 수업에서 새로운 악보에 시달리고 집에 가도 연습해야 했다가 그 다음 수업에 또 두배로 어려운 악보가 앞에 놓여 있는다.. 아무리 연습해도 교수님의 페이스pace에 따르지 못해서 학생들은 갈 수록 불안해지고 의기소침해졌다.<br />교수님이 연습실에 들어오자 학생들은 참다 못해 삼개 월 동안 왜 이렇게 우리를 괴롭히느냐고 물었다. 교수님은 대답없이 맨 처음의 악보를 꺼내 학생들에게 건네주고  확고한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해 보라고 했다. 불가사의한 일이 일어났다. 자신이 이 곡을 이렇게 아름답고 훌륭하게 칠 수 있다니 학생들도 깜짝 놀랐다. 교수님은 또 학생들에게 두 뻔째 수업의 악보를 해 보라고 학생들은  여전히 뛰어난 솜씨를 보여줄 수 있었다. 연주가 끝난 후 학생들은 우두커니 교수님을 바라보고 말이 안 나왔다. “만약에 내가 너희들에게 가장 잘하는 것을 해 보라면 아마 계속 전의 수준에 머무르고  지금의 실력에  이르지 못할 걸’라고 느리게 설명했다.<br /> 사람이라면 잘 알고 잘 하고 있는 것을 드러내기 좋아한다.하지만 뒤돌아보면 끊임없는 도전이나 점점 무거워진 압력 때문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여러가지 능력을 몸에 밴 것이 아닐 까?<br /><br />
<br /><br />Posted at Tue Dec 14 12:14:57 UTC 2010<br />]]></description>
<link>http://www.lang-8.com/181809/journals/728455</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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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creator>aiai</dc:creator>
<pubDate>Tue Dec 14 12:14:57 UTC 201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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